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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로마의 전통적인 동방 전략을 서쪽의 시리아 속주와 북쪽의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강대국 파르티아를 봉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을 내포한 이 도발에 대해 티베리우스는 참으로 냉철하게 대처한다.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중요한 나라임은 변함이 없었지만, 영토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략적 필요 때문에 자신의 패권 밑에 놓아두는 대상이었다. 문화적으로나 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역사적으로도 아르메니아인은 파르티아인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이 아르메니아의 왕위를 차지하는 인물에게 아르메니아의 신하들이 만족하면 아르메니아 국내도 안정되고, 정치 정세가 안정된 아르메니아가 앞으로도 계속 로마의우호국으로 남아 있어주면 티베리우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르메니아 국민들이 왕으로 삼고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싶어하는 제노네스가 로마에 우호적인 폰토스 왕의 아들이고, 그 자신도 반로마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조사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왕이 되려면 그리스식 이름인제노네스를 아르메니아식 이름인 아르탁시아스로 바꾸라는 것이 티베리우스가 내세운 유일한 조건이었다.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쿠스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르메니아 왕궁의 두 수도 가운데 하나인 아르탁사타까지 가서 새 왕인 아르탁시아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것뿐이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 국민들의 환호 속에 아르메니아 왕의 대관식이 끝났다.파르티아 왕은 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막 들어올리려 했던 칼을 내리칠 곳을 잃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파르티아왕인 아르타바누스는 현실적인 군주였는지, 당장 게르마니쿠스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왕의우호조약을 경신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유프라테스 강의 섬에서 만나고 싶다고 조인 장소까지 제안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도망친 보노네스가 시리아에 계속 눌러앉으면 아르메니아 왕위가 불안정해지는 요인이 될 수 있으니까 보노네스의 망명지를 아르메니아에 가까운 시리아에서 좀더 먼 곳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이 요구를 받아들여, 전왕의 망명지를 소아시아의 로마 속주로 결정했다. 그런데거기로 호송되는 도중에 보노네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망치려 했고, 그를 추적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안정요인이 될 수 있는 존재도 이것으로 사라진 셈이다.파르티아 왕을 염두에 두고 아르메니아 문제를 처리한 이 해의 외교는 로마 외교의 성공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서기 34년에 아르탁시아스 왕이 죽을 때까지 아르메니아 왕국은 계속 평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오리엔트 안정의 열쇠인 아르메니아를 로마 쪽으로 끌어당겨두는 데 성공했다.오리엔트에 파견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아르메니아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과 파르티아와의 우호조약을 경신하는 임무 이외에, 이두 가지 임무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로마의 동맹국(사실상의 속국)인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 왕국에 대한 조치가 그것이었다. 오리엔트의 군주국 가운데 강대국은 파르티아고 중간 정도의 왕국이 아르메니아라면,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는 약소국이었다. 둘 다 오늘날에는 터키 동부에 자리잡고 있지만, 로마 제국에는 직할 속주인 시리아와 더불어 가상적국 제1호인 파르티아를 봉쇄하는 전략망의 요충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기 18년 당시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의 왕위는 둘 다 비어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늙은 왕은 반로마적 행동을 했다는이유로 로마에 소환된 채 그대로 이탈리아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노래 다운받는 사이트 에 뒷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고, 콤마게네 왕은 후계자도 없는 상태에서 사망해버렸다.티베리우스는 이 두 왕국을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만 같은 속주화라도 양국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초대 총독에 집정관을 지낸 벨라니우스가 부임한 것을 보면, 티베리우스는 카파도키아를 항구적인 속주로 만들 작정이었던 게분명하다. 한편 콤마게네의 초대 총독은 아직 집정관을 지낸 경험이 없는 법무관(프라이토르) 세베루스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티베리우스는 이 약소국을 독립한 속주로 만들기보다는이웃한 시리아 속주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그 상태에서 왕위 후계자가 자랄 때가지 기다릴생각이었던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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